공주의 남편, 부마가 결혼 못하는 사연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eco@ecomedia.co.kr | 2016-01-19 13: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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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22> 공주의 남편, 부마가 결혼 못하는 사연

평범한 샐러리맨이 재벌 총수 딸에게 장가들면 어떻게 될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신분이 단번에 바뀔 것이다. 하지만 문화차이는 감내해야 한다.

 

조선시대 왕의 사위인 부마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왕의 사위가 되면 ‘위(尉)’라는 관작이 주어진다. 본관에다 ‘위’를 붙인다. 본관이 의성이면 의성위, 경주면 경주위를 받게 된다. 품계는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옹주의 남편

은 종2품이다. 종1품은 부총리급, 종2품은 차관급이다.  

 

재산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토지가 공주에게 850결, 옹주에게 800결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 토지법은 수확량 단위인 결부법이다. 면적 기준이 아닌 수확량 기준이다. 조선 초기에 1결(結)의 수확량은 20석이다. 부마가 되면 1년에 1만6000석 이상의 쌀이 들어오는 것이다. 집도 40간이나 50간까지 웅장하게 지을 수 있다.


무능력하거나 세상에 큰 뜻이 없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다. 그러나 능력 있고, 야망 넘치는 사람에게는 화병이 생길 일이다. 부마는 공주와 사랑으로 이어진 게 아니다. 간택제도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택당한 것이다. 사랑 없는 혼인, 아내를 상전으로 모시는 부담, 명예직만 전전하는 정치활동 등으로 부마는 동기부여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권력을 포기해야 했다. 남자로서 더 큰 아픔은 재혼 불가다. 공주나 옹주가 젊은 나이에 숨지면 부마는 다시 장가들 수 없다. 부마들은 계실이 아닌 첩을 앉혔다. 원칙적으로는 양인 첩도 둘 수 없었으나 이 부분은 엄격하게는 지켜지지 않았다.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12세에 영혜옹주를 배필로 맞았다. 그러나 혼인 석 달 만에 옹주가 요절했다. 박영효는 재혼하지 못했다. 대신 첩들을 두었고, 자녀들은 서출이 되었다. 


부마 재혼 문제가 도마에 오른 것은 성종 때다. 임금은 부마에 대한 네 가지 지침을 내렸다. 재혼 금지, 양민 첩 금지, 자녀의 벼슬길 금지, 후사는 양자 법제화다. 신하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고귀한 공주와 옹주의 제사를 첩의 아들이 모실 수 없다. 부마는 재혼을 하지 말고, 첩도 얻지 말고, 후사는 양자를 들이라”고 다시 확인했다.

사건의 시작은 세조의 왕녀인 의숙공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숙공주는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하가됐다. 의숙공주는 후사 없이 숨을 거뒀고, 정현조는 양반 이징의 딸과 재혼했다. 이 때부터 정현조의 혼인이 재혼인가, 축첩인가 논란이 일었다. 조선은 1부1처제 나라다. 정식으로 혼인한 사람만이 아내이고, 첩은 법률상으로나 사회 관념상 아내가 아니다.


성종은 13년(1482년) 5월 2일 부마의 재혼과 축첩에 대해 걱정한다. 임금은 의숙공주의 남편인 정현조와 경혜공주의 남편인 강자순이 양반가의 딸을 취한 과정을 묻는다. 재혼인가, 축첩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딸로 단종의 누나다. 
반성위 강자순은 “첩은 천인 보다는 양인이 좋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운성부원군 박종우(태종의 경혜옹주)도 양가(良家)의 딸을 첩으로 삼은 전례를 참고했습니다”라며 계실이 아닌 첩이라고 주장했다.

정현조에게 딸을 준 이징은 첩으로 시집보냈으나 정실이 될 것으로 믿은 정황을 진술했다. “정현조와 예(例)에 의한 혼서가 오가지 않았습니다. 정현조의 어머니가 글과 물품을 보내왔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박종우의 첩은 뒤에 적실(嫡室)로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우선 첩으로써 성혼을 한 것입니다.”

성종은 부마가 양인을 첩으로 삼은 것은 잘못임을 판결했다. 다만 소급할 수 없으니 인정하고, 차후는 사족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처벌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주가 죽은 뒤 부마의 재혼은 중종 13년(1518년) 10월 15일 다시 논의된다. 삼정승이 연명으로 “부마는 공주가 죽은 뒤 재취하지 못함은 예부터 근거가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며 악습임을 주장했다. 조선의 법문(法文)에 규정되지 않았는데 정현조의 사례로 인해 폐습이 되었다는 논리다. 법적 근거가 없고, 인륜에도 어긋나기에 폐기되어야 할 불문법이라는 주장에 대해 중종은 “평민은 아내 사후 재혼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부마도 이 준례와 같이 할 것”이라면서도 명문화에는 반대했다.

부마의 재혼여부 논란은 숙종 때 마침표를 찍는다. 숙종 7년(1681년) 7월 26일 부마재혼 금지법이 통과됐다. 예조의 결론은 세 가지였다. 첫째, 부마의 재혼은 조선역사에 없었다. 둘째, 재혼 금지의 의미가 크고 내력도 깊다. 셋째, 부마가 자식이 없으면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후사(後嗣)로 세운다.

부마는 조선 최고의 남데렐라다. 그러나 정신건강상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닌 듯하다. 문화 배경이 비슷한 사람이 만날 때 행복도는 높아진다. 남성이 아내를 상전으로 모시고, 아내가 남편을 주인으로 떠받드는 만남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성(性)은 대등할 때 편안하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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