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결 기자
eco@ecomedia.co.kr | 2022-12-06 15:31:48
반가사유상 서산 마애불과 똑 닮아 북제 영향 ‘국보급’
지난 9월 공개 된 서울 소재 세운미술관(관장 정세운) 소장의 백제 금동불입상과 반가사유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현재 두 점의 유물은 국가 문화재 지정 신청 중이다. 이에 불상을 처음 발견, 고증한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고미술 사학자.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이 불상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본지에 보내 왔다. (편집자주)
미륵 보살반가사유상의 의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미륵상생신앙에서 출현했다. 한국에서 이 유물이 발견 되면 통상 삼국시대 후기의 소작으로 평가 하고 있다. 미륵은 민중의 고통을 구제해 준다는 미래불이다. 삼국시대 끊임없는 전쟁으로 민중들의 사람이 고통에 빠졌을 때 언젠가는 나타나 구제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륵 신앙에서 출현하는 부처는 미륵보살과 미륵여래로 나타난다. 삼국시대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부분 미륵신앙에서 태어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미륵여래는 입상(立像), 좌상(坐像), 의자상(倚子像), 교각상(交脚像) 으로 나타나며 보살상은 반가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교각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의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국보로 지정 된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 중 1구로서 좌측에 배치 된 협시불이다.
서산 마애 반가사유상을 닮다.
이번에 공개 된 반가사유상은 서산마애삼존불 반가사유상을 빼 닮았다. 얼굴은 원만하며 턱이 살찐 방형에 가깝고 상호가 원만하고 아름답다. 보관엔 꽃무늬의 장식이 있다. 화불(化佛)을 배치하지 않은 것은 이 반가사유상이 주존으로 모셔지지 않고 협시불로 안치됐기 때문이다. 머리에 화불을 배치하면 이는 관음보살로 호칭해야 한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는 이 불상이 국립박물관 소장의 가장 대표적인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국보)을 닮고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서산마애삼존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방형의 보관, 작은 키, 목에 건 심엽형의 경식, 그리고 하체의 조각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은 중국 북제 수도였던 업성(邺城)에서 출토된 석조(石彫) 반가사유상을 빼 닮았다. 형제 불상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왜 업성 출토 반가사유상을 닮은 것일까.
백제는 성왕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와 유대가 깊었다. 백제는 372AD 동진에 사신을 보낸 이래 200여년 동안 남조와 교류를 지속해 왔다. 성왕은 특히 양나라 무제(武帝)와 친교가 두터웠으며 많은 지원을 받았다. 백제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것은 이 시기로 상정 된다.
불교성국인 양나라 수도 건강(지금의 남경)을 닮으려 왕도를 부여로 옮기고 대대적인 도시 기반시설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양 제국이 무너지자 성왕도 금강 상류인 옥천에서 신라군에 죽음을 당한다.
북제(北齊)와의 교류는 성왕이 전사하고 위덕왕(威德王)대 부터이다. 삼국사기 위덕왕조 17년 (570AD) 기사를 보면 ‘북제의 후주가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지 차기 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덕왕은 이로 부터 매년 북제에 사신을 보냈다. 중국대륙은 이 시기 신흥국들의 흥망성세가 거듭되는 소용돌이가 지속되고 있었다. 위덕왕은 양나라를 계승한 남제(南齊)에도 사신을 파견한다.
학계는 백제 불상의 조형은 6세기 후반 경부터 조형적, 도상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위덕왕(554~598AD)이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북제(北齊, 567AD), 북주(北周, 577AD)와 교류하면서 북조 불상의 영향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불상은 부드럽고 둥근 조형으로 바뀌고 북조의 석굴 조상을 답습한 마애불상이 조성되기도 했다.
지난 2012년 북제의 수도 업성(邺城)에서 많은 석조 반가사유상이 출토되어 한반도 반가사유상의 시기를 해석하는데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도판 참고) 서산 마애불 협시 반가사유상과 이번에 새로 조사한 금동반가사유상은 이 시기 북제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 된다.
백제 성왕시기 금동보살입상
고대 삼국가운데 백제는 ‘보살(菩薩)의 나라’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지금까지 조사 된 금동불상의 경우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보살상이다. 보살은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상징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심으로 염불하여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 하는 신앙형태이다. 이번에 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조사 된 보살입상은 백제 성왕시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를 통해 영향을 받은 6세기 중반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백제 금동제 소형불상가운데 시대적 특징이 잘 나타나며 보존상태도 완전하여 국보급 유물로 평가 된다.
이 금동불상입상은 독존상인 관음보살로 모셔진 것이 아닌 삼존불의 협시불(脇侍佛) 형식으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금동반가사유상처럼 삼면관(三面冠) 가운데 화불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형태의 보관은 두정에 표현되는 육계가 생략되어 성왕 대 가장 이른 시기의 소작으로 보인다. 머리에 큰 육계가 표현되는 방식은 수나라 영향을 받은 백제 후기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국보로 지정 된 중판 복련 대좌를 보이는 군수리 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보다 앞서 제작 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삼산형 보관은 백제 금동불상에서 처음 조사되는 특이한 양식이다. 흡사 보물 제343-1호로 지정된 부여 규암면 외리 사지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을 연상시킨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나 양나라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있는 백제 사신의 머리에 쓴 관을 닮았으며 당시 귀인들이 일상에서 쓴 모자형태인 듯하다. 이 같은 삼산관의 형태가 중국 여러 곳에서 출토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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