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대기업의 ‘ESG 경영’, 건축자재 EPR 제도의 붕괴

김한결 기자

eco@ecomedia.co.kr | 2025-09-23 17:02:28

[이미디어= 김한결 기자] 대한민국 건축 현장에는 거대한 모순이 존재한다. 기업들은 ‘지속가능경영(ESG)’을 내세우며 친환경 이미지를 쌓고 있지만, 정작 자원순환의 기본 축인 EPR(생산자책임재활용) 제도의 건축자재 분야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무허가·비규격 자재는 시장을 교란하며 국민 안전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건축자재의 EPR 의무이행률은 57%에 그친다. 특히 PVC 제품의 경우 재활용 의무이행률이 47.3%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생산된 제품 중 절반 가까이가 제대로 된 재활용 체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저조한 실적의 배경에는 겉으로는 ESG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부 대기업들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공제조합 가입을 회피하거나 의무량을 축소 신고하는 등 재활용 분담금을 회피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실제로 전체 부과 대상 1,290개 업체 중 360여 곳이 미납상태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기업들이 ESG 홍보에는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활용 영역에서는 비용 절감만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행태는 중소기업들로 하여금 ‘무임승차’를 부추기고, 성실히 분담금을 납부하는 기업들만 피해를 보는 기형적 구조를 고착시키고 있다.

현장의 한 기업 관계자는 “우리는 법규와 기준을 준수하며 재활용 분담금까지 성실히 납부하고 있는데, 불법 업체들은 이런 비용을 회피하니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며 “정직하게 사업하는 사람들을 이 바닥에서 몰아내는 꼴”이라고 절망을 토로했다.

불량 자재의 위험한 침투… 공공기관까지 비리 만연
대기업의 책임 회피가 낳은 또 다른 결과는 국가기술표준(KS, GR, KCS 등)을 무시한 무허가·불량 자재의 확산이다. 일부 대기업 건설사나 공공기관이 저가 경쟁을 이유로 불법 업체와 암암리에 거래하면서, 비규격 제품이 건설 현장에 사용되고 있는 실태가 확인되고 있다. 

▲ 환기 덕트의 경우 한번 설치가 되면 건축물 내부 또는 천장에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하자 여부를 알 수 없다.
특히 환기 덕트 분야에서는 1.5T 대신 1.2T~1.3T 얇은 제품이 사용되어 공기 압력으로 인한 파손 및 먼지 누출 위험이 있다는 제보가 나왔다. 익명의 제보자는 “비규격 제품들은 대부분 재활용 분담금을 내지 않는 무허가 업체들이 주로 유통하며, 가격은 인증 제품과 비슷하게 받아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며, “K사, H사 등 대기업들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사용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불법을 넘어 심각한 환경·안전 문제를 야기한다. 강풍에 취약한 가설 방음벽, 소음 차단 성능이 떨어지는 창호, 결로 및 곰팡이 등이 생기는 환기 시스템 등은 고스란히 주변 주민과 소비자에게 피해가 간다.


더욱 심각한 것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와 같은 공공기관의 사업에서도 비리가 만연하다는 점이다. 새 자재 사용 계약에도 불구하고 중고자재나 비규격 제품이 설계에 반영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감리업체와 전관(前官) 인사들이 연루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는 국민의 주거 안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 LH 시흥 하중지구 건설현장, 새 제품을 활용하는 계약과는 다르게 중고 자재(H빔, 가설방음벽)가 버젓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환경당국과 공공기관은 여전히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환경공단 자료에는 EPR 제도 개선 논의 현황이 “특이사항 없음”으로 기록돼 있어 문제 해결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 관계자는 “조합에 가입해 분담금을 내는 이유는 불법 업체들의 무임승차를 막아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데, 지금 상황을 보면 조합의 존재 의미 자체가 의문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ESG 경영’이라는 허울 속에서 대기업의 위선과 공공기관의 무책임이 불법 자재 유통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성실한 기업과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으며, 이제는 당국과 조합이 보여주기식 정책을 넘어 실질적인 제도 개선과 강력한 단속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건축자재 재활용 인증·입찰, 허술한 관리에 비리 의혹까지
국내 건축자재 재활용 제도 운영 과정에서 허술한 관리와 불투명한 관행이 반복되면서 업계 내부에서 불만과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부 단체 표준 인증은 제품의 인장강도나 밀도, 발성 유해물질 여부 등 최소한의 시험성적만 확인할 뿐, 공장 등록증·환경인증·재활용 부과금 납부 여부 등 필수적인 요건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재활용 부과금을 내지 않은 기업이 당연히 인증을 받을 수 없는데도, 일부 단체는 이를 따지지 않고 형식적인 서류만으로 인증을 내주고 있다”며 “이는 시장 질서를 왜곡하고 정직하게 운영하는 업체들만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특히 건축자재 시장은 하이샤시, 파이프 등 대규모 수요가 발생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재생 원료 사용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가설 방음벽 등 특정 용도로만 쏠려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또한 “재활용 시장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해관계 때문에 신규 업체 발굴이나 시장 확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에는 경기도 고양 창릉 신도시 공사 과정에서 특정 비규격 제품이 입찰공고에 명시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커졌다. 해당 자재는 규격 제품이 아님에도 관급자재 조건으로 특정돼 고가로 책정됐고, 이에 업계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재공고 또는 수정 공고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익명의 제보자는 “공무원이 특정 제품을 찍어 관급자재로 지정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며 “입찰 공정성과 시장 신뢰를 훼손하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관행이 단순한 관리 소홀을 넘어, 해외 출장 명목으로 사실상 관광을 다녀오며 형식적인 MOU를 체결하거나, 규격 외 제품을 고가에 납품하는 구조적 비리로 이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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