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신문로 2가 역사 조명…경희궁터 변화과정 담아

일제강점기 경성중학교와 해방이후 명문고 서울고등학교 설립이 지역에 준 영향
이지윤 기자
eco@ecomedia.co.kr | 2021-06-14 23: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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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디어= 이지윤 기자] 신문로2가는 옛 경희궁 영역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으로 경희궁의 흥망성쇠와 명맥을 같이하는 곳이다. 왕이 떠난 경희궁터에는 일제강점기 학교와 전매국 관사지가 들어섰고, 해방이후 서울고등학교와 고급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경희궁 일부가 복원되고 서울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의 공간이 어떻게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자.


서울역사박물관장은 2020년 신문로2가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결과를 담은 '신문로2가,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 보고서를 2021년 5월 발간하였다고 밝혔다. 

 

경희궁, 경복궁을 대신해 건설되고, 경복궁 건설로 폐허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이 불타고, 창덕궁은 기거하기를 꺼려해 왕기가 서렸다는 곳에 경희궁을 1617년에 건설했다. 1865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자 경희궁 전각의 목재와 석재는 새로운 궁궐의 자재로 활용됐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희궁의 빈터는 명례궁 등 4개의 궁에 토지로 분배되고 뽕나무가 심어지는 등 궁으로서의 위상은 점점 사라졌다.


경희궁은 빈 땅으로, 궁역 경계부는 개발로 모호해져 
경희궁의 일부 전각과 빈 땅은 권업박람회 예정지로 지정되거나 각종 사교모임의 장으로 활용됐으며, 궁의 경계부는 각종 개발로 모호해졌다. 남쪽부지는 전차개설과 신문로 확장으로 궁의 일부가 잘려나갔으며, 동쪽은 전매국 관사 건설로, 서북쪽은 경성측후소와 남감리교 숙소가 건축되어 광활한 경희궁과 주변의 영역구분은 점차 흐려졌다.

 
신문로2가 곳곳에 남아있는 경희궁의 흔적 
경희궁지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일부는 보존해 전시되거나 안내판이 설치돼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히 경희궁의 동쪽 경계부는 흔적이 남아 궁장의 일부가 복원됐으며, 경희궁의 정자 춘화정이 있던 성곡미술관에는 숙종 대에 설치한 반월형 석조 연못이 발견되어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최신식, 최고급의 시설을 갖춘 최고의 학교, 경성중학교
1910년 설립된 경성중학교는 조선에 거주하는 고위급 일본 관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로 설립됐다. 초기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 경희궁의 일부 전각을 사용했으나, 1926년 이후 하나씩 건물이 매각됐다. 경성중학교는 본관, 체육관, 수영장, 테니스코트, 도서관, 강당 등을 갖춘 최신 시설의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전쟁이 격화되자 서울 곳곳에 방공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경성중학교 부지 내 방공호 건설 공사는 1944년 겨울부터 시작돼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건설했다. 미완성인 채로 해방을 맞이하였고, 6·25전쟁 당시 군인들이 잠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도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인근에 방공호는 남아있으며, 서울고등학교 학생들의 회고담에도 접근금지 장소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신문로 감옥소’ 서울의 명문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중학교는 해방 이후 경성중학교에서 새롭게 거듭난 ‘신흥학교’로서 선생과 학생을 모두 새로 모집해야 하였다. 당시에 월남한 이북 명문중학교 출신 학생들을 대거 서울고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학생 수를 충원할 수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초대 김원규 교장의 엄격한 교육과 훈련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신문로 감옥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명문학교로 거듭나기 위해 조병화, 황순원, 김광식 등 각계 인재들을 교사로 초빙해 학생들에게 우수한 교육을 제공했고, 교사들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사택을 제공하여 안정적 생활기반이 되도록 했다.


'신사가 있던 곳에는 삼일탑을 건설’,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 철거
 서울고등학교는 신설학교였지만, 경성중학교의 시설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일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있던 신사를 허물고 그곳에 삼일탑을 세웠으며, 각종 기념비와 무기고 등을 철거했다. 한편, 운동부실을 개조하여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학생들의 다양한 문예활동을 지원했다.


광복절 등에는 서울시내를 밴드부가 행진하여 시민들에게 볼거리 제공
밴드반은 1949년 초 창설되고, 각종 관악대회에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어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1955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식에서 서울고 밴드반은 을지로~충무로입구~남대문~세종로~서울고로 이어지는 첫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이후 유명해진 서울고의 시가행진은 서울고 학생들뿐 아니라 서울시민의 구경거리가 됐다.

 

신문로와 인접하는 학교 남쪽 영역은 중국인들이 상점과 창고로 이용하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곳의 중국집·공갈빵집을 자주 들렀으며, 이 중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애용했다는 중국인 ‘왕취복 양복점’도 있었다. 일부 신문로 거주민은 전족을 한 중국 여성을 자주 보았다고 하나, 1970년대 신문로 확장공사로 중국인 상점가로는 사라졌다.

 

도심과 가깝고, 경성중학교와 인접한 우수한 관사지, 전매국 관사의 형성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에 있는 조용한 고급주택지는 1920년대 형성된 전매국과 총독부 관사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일본은 늘어나는 경성 거주 일본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관사를 건설했는데, 대부분은 부지확보가 쉬운 빈 땅의 국유지, 산자락, 조선시대 대형필지 등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희궁과 경복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고, 궐내 및 주변에 대규모 관사가 건설된 것이다.

 
1921년 공터로 남아 있던 경희궁지 내 동측 약 2만1500평 부지에 35호의 전매국 관사가 건설되기 시작해 1922년에 완공됐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관사가 배치됐고 관사와 나란하게 관통하는 3개의 가로가 마련됐다. 이후로도 몇 차례에 추가 관사 건설이 이뤄졌고, 주변 내수동 관사, 신문로1가 관사지와 더불어 대규모 관사지를 형성했다.


이곳은 도심에 자리하며, 총독부청사·전매국청사 등 주요 관청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녹음에 둘러싸인 조용한 주거지이자 명문 경성중학교와 가까워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였다. 등급에 따른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비슷한 구조의 관사였는데, 관사지 중앙에 위치한 신문로2가 1-105번지 관사의 경우는 약 270평 대지에 30평 정도의 단층 건물, 창고와 우물이 있는 규모였다.

 
해방 이후 관사 불하, 누가 이곳에 들어왔을까?
토지대장과 각종 신문기사와 법규를 살펴보면, 국유지인 신문로2가의 토지가 개인으로 소유자가 바뀌는 시기는 1955년 전후인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소유주는 대부분은 불하를 통해 신문로2가 관사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 소유자 중에는 전매국 소속 공무원을 비롯한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들이 대다수였다.


1950~1960년대에 유입된 기업인들은 초기 소유주인 라익진(동아무역 대표), 김형남(일신방직 대표), 조정구(삼부토건 대표), 임대홍[미원(현 대상그룹) 대표]을 필두로 초기 소유주에게 매입한 김성곤(쌍용 대표), 황규삼(풍성전기 대표), 배현규(한일투자금융 대표), 김동신(금강제화 대표), 서병식(동남갈포벽지 대표), 김신권(한독약품 대표), 신춘호[롯데공업(현 농심) 대표], 고홍명(파이롯트 대표), 이건희(삼성) 등이다. 이건희는 주택을 매입해 철거한 후 공지 상태인 채로 부지를 계속 소유했고, 나머지 기업인들은 실제로 거주했다. 1970년대에 새롭게 이주한 인물로는 김우중(대우 대표)과 김재홍(한승건설 사장) 등이 있다.


1960년대 목조 관사를 허물고 대부분은 현대식 주택을 건설했고, 대규모 필지의 고급주택의 양산, 기업 총수 및 고위공무원 등의 거주 등은 이곳을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주택지로 자리매김 하는 한 요인이 됐다.


빈번한 개발 신축으로 조용한 주택지는 사라지고, 복합기능지로 변화 
명문학교와 인접해 주거 선호도가 높은 신문로2가는 1974년 고교평준화 및 학군제 도입과 1976년 도심 내 명문고의 강남이전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논현동 일대의 주택지가 부각되고 최고가를 자랑하던 신문로2가의 주택지 선호도는 급격히 떨어져, 1983년 최고가 주택지의 자리를 논현동에 내어주게 됐다.

 

더불어 호화주택 중과세부과 정책과 강남개발에 따른 거주민들의 변화로 1980년대부터 신문로에는 대사관을 비롯한 사옥, 문화시설, 출판사 등이 입지해 주거지의 성격에서 복합기능지의 양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신문로 주택가에 거주한 10여 명의 주민들의 이야기 
신문로2가 구술조사에서는 고령의 104세 김옥라가 참여했다. 김옥라는 1930년대 경성중학교에서 검정고시를 치루면서 신문로를 처음 경험했고, 1954년부터 현재까지 신문로에 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거주자이다. 자녀들의 덕수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해 사형제를 키웠으며, 현재는 자원봉사자 전문양성기관인 (재)각당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도 일제강점기 일본 관사를 유지하면서 거주한 이동 일가는 2세대에 걸쳐 이곳에서 자녀들을 키웠으며, 신문로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사를 유지한 집안이다. 겨울이면 실내에서도 물이 얼고,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석탄보일러로 인내한 가족의 힘겨운 목조 관사생활은 가족의 추억이 됐다. 이곳을 고향처럼 여긴 이동 일가는 1993년 관사주택을 이사하던 날을 기념하며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안한수와 이창의 구술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 신문로 초입 욱일빌딩 지하에는 김현식, 전인권, 김현철 등 당대 유명한 가수들을 배출한 동아기획사가 있었다고 한다. 가끔 신문로 초입에는 검은 자동차에서 내리는 가수들과 열성 팬들을 볼 수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4년부터 신문로에 자리 잡은 주한체코대사관은 신문로의 대표적인 대사관으로 이번 인터뷰에 참여한 주한체코대사는 도심의 정부기관과 문화시설이 인접한 신문로의 위치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신문로가 바쁜 서울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산책하면서 다니는 의미 있는 곳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김옥라를 비롯한 쌍용 회장 김성곤의 부인 김미희 등으로 결성된 신문로 주부들의 모임이 1960년대에 결성돼 지역봉사활동 및 장학사업 등을 꾸준히 이어왔다. 2009년 주민들의 고령화와 이주로 해체됐지만 소위 ‘사모님’들의 모임인 ‘신문로 주부클럽’은 일반 사교모임과 달리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모범적이 사례다.

 

신문로와 내수동 주민들이 애용한 우물은 내수사의 우물
 신문로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안한수는 서울역사박물관 초입에 있었던 고목과 내수동에 있는 우물에 대해서 말해줬다. 경희궁에 있었던 나무로 추정되는 고목에서 매년 경찰의 날에 주민들이 제사를 지냈으나, 신문로파출소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벌목되었다고 한다.


내수동 우물은 물이 좋아서 신문로와 내수동 주민들이 1960년대까지 사용했으며, 현재 10평 남짓한 국유지에 남아있다. 이 우물은 인근 내수동 110-5번지가 발굴을 통해 내수사 터임이 밝혀지면서 내수사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우물 내부는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아 올려진 것으로 보아 일반 사가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아닌 궁이나 기관에서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020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신문로2가,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은 서울책방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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