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농작물의 수분을 담당하는 꿀벌이 단순한 수분매개자를 넘어 농업·자연환경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생물학적 감시종(biological sentinel)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꿀벌이 꽃가루와 꿀, 물을 채집하며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농약과 환경오염물질 등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만큼 벌집과 군집의 건강 상태를 살피면 주변 생태계가 받는 복합적인 환경압력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 카탄자로대학교와 시에나대학교, 미국 템플대학교, 스바로건강연구기구(SHRO) 등 국제 연구진은 꿀벌(Apis mellifera)에 대한 2010~2025년 연구를 종합한 리뷰논문을 Environmental Toxicology and Pharmacology에 발표했다. 논문은 특히 농약에 장기간 노출됐을 때 나타나는 치사 이하의 영향과 여러 스트레스 요인의 상호작용을 분석했다.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농약이 벌을 즉각 죽이지 않는 농도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농약 위해성평가는 일정량의 화학물질이 생물의 절반을 사망시키는 급성독성 지표인 LD₅₀ 등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실제 농업환경에서는 벌이 한 번의 고농도 농약에 노출되기보다 낮은 농도의 여러 화학물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만성·저농도 노출은 벌의 신경생리와 학습·기억, 먹이활동과 방향탐색, 면역반응 등에 영향을 주면서 군집 전체의 건강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특히 농약과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경우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연구진은 살충제뿐 아니라 살균제와의 혼합 노출, 영양 부족, 병원체와 기생충, 기후·서식환경 변화 등이 서로 결합하면서 벌의 생리와 행동, 번식, 장내 미생물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개별 요인만으로는 큰 피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여러 스트레스가 겹치면 군집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연구진은 현재 등록된 농약 상당수에 대해 치사 이하 영향 자료가 부족하며, 가능한 농약 혼합물의 99% 이상은 독성이 제대로 시험되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농약의 안전성을 평가할 때 개별 화학물질의 급성독성뿐 아니라 장기간 노출과 혼합효과, 군집 수준의 변화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꿀벌은 주변 환경의 변화를 확인하는 데 유용한 생물학적 지표가 될 수 있다. 꿀벌은 먹이를 찾기 위해 주변 경관을 넓게 돌아다니며 오염물질을 벌집으로 가져온다. 벌과 꿀, 꽃가루, 밀랍 등에 축적된 물질이나 벌의 생리·행동 변화를 분석하면 농약뿐 아니라 중금속과 대기오염물질 등 주변 환경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연구도 축적돼 있다.
연구진은 이를 인간·동물·생태계 건강을 하나의 체계로 바라보는 ‘원 헬스(One Health)’ 관점에서 해석했다. 꿀벌의 건강 악화는 벌 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수분매개 활동이 감소하면 식물의 번식과 생물다양성, 농작물 생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결국 식량체계와 인간사회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꿀벌은 동물 건강과 환경 모니터링, 농업 지속가능성, 인간의 복지를 연결하는 일종의 접점인 셈이다.
안토니오 지오르다노 템플대학교 교수 겸 SHRO 설립자는 꿀벌의 건강이 화학물질 노출과 영양상태, 병원체, 생태조건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반영하기 때문에 환경의 생물학적 감시종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오반나 리구오리 SHRO 원헬스 그룹 책임자도 꿀벌 모니터링이 환경 스트레스의 ‘조기경보 시스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꿀벌 보호를 위해 특정 농약 하나만 규제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여러 환경 스트레스와 군집 회복력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통합적 해충관리(IPM)를 확대하고 다양한 꽃과 먹이원을 확보하는 한편 영양상태와 장내 미생물, 면역 건강을 유지하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프로바이오틱스나 영양 보충 등의 방법은 실험실 단계에서는 가능성을 보였지만 대규모 현장 효과는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이번 연구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꿀벌이 환경오염을 측정한다’는 사실을 처음 입증한 연구라기보다, 기존 연구들을 종합해 꿀벌의 만성·복합 스트레스 반응과 환경 감시종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제시한 리뷰논문이다. 따라서 향후 벌의 사망 여부만 확인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행동과 면역, 번식, 장내미생물 등 여러 지표를 장기적으로 모니터링한다면 농업환경의 이상 징후를 보다 빠르게 파악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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