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기후변화로 전 세계 기온이 상승하면서 에어컨은 폭염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필수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냉방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망 부담과 온실가스 배출, 도시 열섬 현상을 동시에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냉방 전략이 에어컨 중심에서 벗어나, 건물 자체가 열을 덜 받아들이고 자연적으로 식을 수 있도록 설계되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UNSW Sydney)의 매트 산타무리스 교수 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Nature Reviews Clean Technology에 발표한 리뷰 논문에서, 기후변화 적응을 위해서는 에어컨에만 의존하지 않는 건물 냉방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복사 냉각 소재, 증발 냉각 기술, 태양열 차단 시스템, 지능형 환기 기술 등 전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실내 온도를 낮출 수 있는 패시브 냉각 기술의 최신 동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산타무리스 교수는 “에어컨은 생명을 구하며 극심한 더위 속에서 여전히 필수적인 장치”라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를 에어컨 설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모든 건물이 기계식 냉방에만 의존하게 되면 전력 시스템에 막대한 압력이 가해지고, 동시에 도시 공간으로 더 많은 폐열이 배출돼 도시를 더 뜨겁게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냉방 전력 소비는 이미 전체 전력 사용량의 약 10%에 이르고 있다. 전 세계에서는 매초 약 10대의 에어컨이 새로 판매되고 있으며, 2050년까지 주거용 에어컨 보급 대수는 약 56억 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더운 기후 지역에 사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적 이유로 안정적인 냉방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냉방 문제가 에너지 문제이자 기후 정의, 공중보건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연구진은 패시브 냉각 기술이 이러한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패시브 냉각은 에어컨처럼 전기를 사용해 실내 온도를 낮추는 방식이 아니라, 건물에 들어오는 열을 줄이고 내부 열을 외부로 배출하도록 돕는 설계·소재·환기 기술을 말한다. 외부 차양, 고반사 소재, 자연 환기, 복사 냉각 코팅, 증발 냉각, 하이브리드 냉각 시스템 등이 이에 포함된다.
연구진은 패시브 냉각이 에어컨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냉방의 첫 번째 방어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건물 설계와 소재, 환기 시스템을 통해 기본적인 냉방 부하를 낮춘 뒤, 꼭 필요한 경우에만 고효율 에어컨 등 기계식 냉방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초냉각 소재, 복합 복사·증발 냉각 코팅, 외부 차양 시스템, 개인 맞춤형 환기 기술, 대기 중으로 직접 열을 방출하는 복사 냉각 소재, 여러 냉각 방식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 등을 주요 기술로 제시했다. 이러한 패시브 냉각 전략과 효율적인 건물 설계를 함께 적용하면 더운 기후 지역에서 냉방 수요를 최대 80%까지 줄일 수 있으며, 전력 피크 수요를 낮추고 정전 시 건물의 회복력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패시브 냉각은 에너지 절감뿐 아니라 공중보건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건물과 도시 공간의 온도를 낮추면 열사병 등 폭염 관련 질환 위험을 줄일 수 있고, 폭염 시 전력망에 가해지는 부담도 완화할 수 있다. 특히 전기요금 부담으로 에어컨 사용이 어려운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에게는 실내 온도를 낮추는 건축적·도시적 대책이 생명 보호 수단이 될 수 있다. 정전 상황에서도 패시브 냉각은 실내 온도 상승을 늦춰 안전성을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연구진은 도시가 계속 더워지는 상황에서 건물 기준과 도시계획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지어지는 건물은 2050년 이후에도 사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과거의 기후 조건이 아니라 앞으로 경험하게 될 더 뜨거운 기후를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건축 기준을 강화하고, 패시브 냉각 기술 도입을 지원하며, 저소득층 지역사회가 저렴하고 안전한 냉방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연구진은 제안했다.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냉방은 에너지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 도시계획, 전력망 안정성, 공중보건, 사회적 형평성이 결합된 복합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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