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디어= 김한결 기자] 폐기물 처리 부담을 생산자에게 전가시켜 재활용을 촉진하는 EPR(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가 도입 20여 년을 맞이한 가운데, 제도의 실효성과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금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2023년부터 건축용 단열재, 섬유제품, 합성수지 건축자재 등 총 14개 품목이 신규로 EPR 대상에 추가되면서, 적용 범위가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EPR 품목을 점차 확대하는 이유는 자원의 재활용률을 높이고 발생되는 폐기물을 감소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EPR은 생산자가 재질과 설계를 개선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소비자와 지자체, 정부가 함께 자원순환을 책임지는 협력구조는 지속가능한 순환경제 시스템의 기반이다. 현행 EPR 제도는 제품 생산자가 출고량에 따라 재활용 의무를 이행하거나, 재활용사업공제조합에 재활용분담금을 납부하여 조합이 의무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제도가 확대되는 만큼 현장의 불만과 회피 전략도 함께 늘고 있다. EPR의 허점을 파고든 일부 기업들은 비슷한 품목이라도 EPR 대상이 아닌 방식으로 설계를 바꾸거나, 중소기업은 부담을 이유로 제도에 대한 이행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여러 업체들이 불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들고 재활용돼야 할 자재들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하는 현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에 EPR이 자원순환의 윤활 장치로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보다 정교한 설계와 실행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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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VC 바닥재를 재활용하기 위해 1차 분쇄한 모습 |
건축자재 분야 ‘재활용 의무’ 유명무실
2023년 기준 국내에서 발생하는 건설폐기물은 연간 6,437만 톤으로, 전체 폐기물 발생량의 약 36.5%를 차지한다. 문제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가 건축자재 분야에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PVC 창틀, 덕트, 바닥재 등 특정 품목에서 시장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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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한 건설현장에 쌓여있는 각종 건설 폐기물들이 방치되고 있다. |
본지 취재에 따르면, PVC 및 창호 자재 분야에서 EPR 제도 적용 대상인 약 360개 기업 중 조합에 가입한 업체는 111곳에 불과했다. 가입률은 약 30% 수준이며, 나머지 70%는 의무 이행 없이 사실상 제도를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실제 재활용의무율은 10.1%에 그치고 있으며, 제도 자체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 재활용 업체 관계자는 “조합에 가입해 분담금을 납부하는 기업은 양심적인 일부 소수에 불과하다”며 “다수 업체는 분담금을 회피하거나, 무허가 업체와 결탁해 서류상으로만 의무를 이행하는 식으로 편법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형식적 이행과 행정력 부족으로 인한 시장 불균형 초래
많은 기업이 조합에 분담금을 납부한 뒤, 실제 회수 및 재활용 과정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례가 많다. 숫자 맞추기에 집중한 보고에 그치고, 실질적인 자원순환 성과는 낮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PVC류, 생활용품 등 신규 품목군에서 70% 수준의 기업이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다. 가입하지 않은 기업은 사업을 영위하면서 단속에 걸릴때까지 분담금을 회피할 수 있으며, 만약 단속되더라도 오랜기간 쌓여온 미납분담금을 감당할 수 없어 부도를 내는 상황이 발생되고 있다. 이로 인해 준법 기업만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적 불균형이 발생되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기업들을 말려죽이는 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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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활용이 가능한 PVC 재질의 방음벽이 쌓여져 있다. |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조가 쉽게 개선되지 않는걸까. 문제는 EPR의 관리·감독 기관인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의 대처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한국환경공단 EPR 제도 담당자는 “매년 출구조사를 통해 EPR 제도권 내 기업들을 찾아 재활용분담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며, “제도 운영의 걸림돌이 있다면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재결과 EPR 대상 업체들의 현황파악도 안되어 있었고, 구체적인 미납 현황이나 징수율 등에 대한 명확한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합의 상황은 어떨까. 한국건축재재활용사업공제조합 관계자는 “조합 자체적으로 EPR에 해당되는 기업들을 조사하고 해당되는 기업들에게 EPR에 대한 안내 및 가입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가입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교육·홍보 활동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PVC 제품 공제회원 현황>
구분 |
공제회원 수 |
전년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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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설립기준) |
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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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말 |
95 |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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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말 |
111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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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웛 | 111 | - | |
이 뿐만아니라 중복된 기능의 조합들이 여럿 존재하여 행정 처리의 비효율성과 인력 부족으로 인한 관리·감독 기능의 부재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EPR 제도의 핵심인 '생산자 책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제도의 강제성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건축자재 재활용부과금 미이행, 준공 단계에서 걸러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의도적인 제도 회피를 방지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정책 제안자는 “모든 건축물의 준공 시점에서 재활용부과금 대상 자재에 대한 납부 확인 서류를 필수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납부 확인은 해당 제품의 공제조합 가입 확인서 및 납부 내역서로 증명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현장 단속이나 추가 행정력 없이도 이행 여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효율성이 기대된다.
또한, 미납 업체가 폐업할 경우 납품 이력을 세금계산서를 통해 역추적하고, 최종 수요자인 건설사가 재활용부과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방식도 제안됐다. “이렇게 되면 건설사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미이행 업체의 제품을 외면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 제도의 미비점은 단순히 행정의 문제를 넘어 국민 삶의 질과도 직결된다. 고의로 부과금을 회피한 업체들의 비규격 자재가 실제 주택에 사용되고, 국민들은 비싸게 비용을 치르며 품질이 떨어지는 주택을 떠안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게 내 집을 마련했는데, 그 집이 불량 자재로 덮여 있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 몫”이라는 것이 제안자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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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H 부천 대장지구 건설현장에서 부적합한 품질의 방음벽을 재사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pvc방음벽은 재사용이 가능하나 파손된 부분은 보수하고, 이물질등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이 현장에서는 부적합한 품질의 방음벽이 다수 설치되어 있어 문제가 있어 보인다. |
EPR, 방치하면 '무법지대'...근본적 제도 개편 시급
우리나라의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가 환경보전과 자원순환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건축자재 분야의 운영 실태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특히 낮은 조합 가입률, 불투명한 분담금 관리, 허술한 감독체계, 대기업의 책임 회피 등으로 인해 EPR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 운영 당국이 현재의 방임적 태도에서 벗어나, 강제적 의무화와 이행 실적에 따른 명확한 페널티 시스템 도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미이행 기업에 대한 철저한 제재와 함께 대기업의 책임 있는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유인과 규제, 디지털 기반의 재활용 추적 시스템(RFID 등) 도입 등을 통해 자원순환 시스템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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